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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탄생했을 때, 그건 지구의 탄생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아직 푸르고, 인간들에 의해서 메마르지 않을 무렵이었다. 온 세상이 풀로 가득하거나 화산에선 제대로 폭발이 일어나고, 자연을 거스르는 이들이 없는 세상. 우주에도 그런 세상이라는 게 있다면, 생명체라는 존재는 얼마나 야속한지 알 것이다. 크리스가 연구에서 동경하던 건 그런 과거였다. 상처받은 사람 따위 있지 않는 세상. 작은 인공관에서 자라나는 풀과 잡초를 감상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식물의 줄기가 배양관 바깥에 튀어나오는 때도 있었다. 자연은 그녀에게 있어서 마법이었다. 작은 관 안에서도 제대로 풀 냄새가 났다. 일어나지 않은 시대를 그리워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이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공적인 것에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떨 때는 밉다가도, 어떨 때는 좋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녀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크리스는 계속 길을 걷고, 또 걸었지만 도달하지 못했다. 자연이라는 걸 사랑할 수는 있어도 신의 피조물은 사랑하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저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누군가는 크리스의 생각이 극단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원래 잘 돌아가는 만큼 돌아가지 못하는 인간도 많다.
살아있다는 건 여러 뜻이 있었다. 어떨 때는 아직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떨 때는 살아있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들어온 공원 깊숙이 있는 광장에서 무대 쪽을 쭉 바라봤다. 무너진 건물의 철골이나 머리만 떨어진 분수의 동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것. 크리스는 진짜 세계에 올 때마다 원하는 이상과는 다른 격차를 느꼈다. 하나의 감정일 수도 있었다.
‘만일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이란 건 원래 멋대로 만들어지기에 세상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무너지는 세상을 볼 때마다 그녀의 속까지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누구나 들 것이다. 불안감, 잘 됐으면 하는 막연한 감정, 죄책감. 그리고 다른 감정들도. 만일 계속 포기하지 않고, 연구했으면 세상에 기여하는 게 있었을까 하는 추상적인 후회라는 존재도 그녀의 안에 있었다. 전부.
그런 의미에서 외계인이라는 건 다른 사람에 있어서 ‘구세주’이자, 왕이었다.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건 인간도 있겠지만 수 천 년을 지나 다시 지구로 온 외계인도 있었다. 어째서 그때 지구에 왔는지는 대답을 하지 않다가 대뜸 도시를 만드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한스는 비밀을 숨겼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시 내의 사람들은 몰라도, 그녀는 확실히 그의 의도에 궁금증이 있었다. 그 감정 뒤에는 확실히 다른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굳이 이를 드러내진 않았다. 말 그대로 그녀가 혼자 애쓴다고 해서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학계 내에선 ‘정신병’이라고 불리는 것이었으니까. 어떤 계기로든, 어떤 기회가 오든 그녀는 세상을 구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맹세했다. 크리스는 광장에 서서 빈 무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날씨는 휑했고, 밑에 깔린 인조 잔디는 부서지거나 시들지 않았다. 밟으면 밟히는 대로 숙이고, 신발을 떼면 그대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이런 세상의 무엇이 완전하지 않다고 그녀 스스로 얘기할 노릇일까. 문제는 그 비밀은 온전히 한스라는 외계인의 것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이미 세상을 관통했던 존재와는 통한다고 느껴도, 착각일 게 분명했다. 다만,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을까? 크리스는 단지 그 까닭이 궁금했다.
그 외계인은 어느 날 모래 위에 서서히 착륙한 UFO 속에서 나타났다. 사막 위에 모래가 엄청난 속도가 솟아오르자, 사람들은 모래가 폭발하자 그 장소로 향했다. 먼지가 흐르고, 검은 연기가 일어나는 퀴퀴한 공기가 흐르는 곳에서 우주선에서 계단을 내려 재림한 또 다른 존재의 신을. 사람들은 모래 속에서 사람 같은 인영을 봤다. 한스는 그때의 인간들을 봤다. 구제할 것 없는 불쌍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크리스는 이런 사람들의 억측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건 그냥 망상이지. 세상을 누가 구해줄 거라고 믿는 망상.’
겨울의 바람은 차가웠다. 잔디는 크게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그건 누군가가 필요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대는 여전히 텅 비어 있다.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전히 의도한 게 아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어느 날은 바람이 불고, 어느 날은 높이 해가 떠 있다. 그런 때도 있다. 불가변적인 세상과 하늘은 지루했고, 사람들은 정해진 패턴 내에서도 늘 변화를 원했다. 그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 안에서 빨간 서커스 천막을 제치고, 한 인영이 걸어왔다. 도시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흰 무대 위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크리스는 한스를 노려봤다. 분명 누구도 세상을 구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한스는 세상을 구하는 일쯤은 간단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보통 세상이라면, 쉽게 의심을 살 일을 스스럼없이 하면서도 간절한 상황 때문에 믿음을 샀다. 어쨌든, 새로운 도시를 만든 사람이니까. 그녀가 해낼 수 없는 ‘공존’을 겉으로나마 해 내는 사람이었다. 그걸로 이유는 이미 생겼다. 한스는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의 상태를 점검하고, 다시 마이크를 꽂았다. 사람들은 벌써 한스한테서 기대하는 말이 있었다.
얼른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해. 새 도시 확장 계획이라도 세우는 게 어때? 이런 말들. 누구든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목구멍 속에서만 차오르는 말들이었다. 어차피, 본인이 원하는 말들은 한스가 다 해 줄 게 분명하다. 실실 올라오는 입꼬리를 감당해내지 못하느라 바쁠 지경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무슨 말을 하리라고는 쉽사리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기대를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늘 있었다. 하지만 겨울의 하늘이 높으면 높을수록,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우면 차가울수록 얼어붙을 듯했다. 하지만 그걸 느끼는 사람은 적은 듯하다. 그녀는 다소 심각한 얼굴을 한 한스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는 하얀 뭉치를 읽다가 무대 밑으로 버렸다. 스르르 손에서 자연스레 놓아버렸다. 그는 그 대본 안에서 뭘 읽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떨어뜨린 거라면.
“안녕하세요,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그렇게 인사한다.
“우리는 좀 더 나아가야 합니다.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쌩한 바람이 한 차례가 흘러들었다. 하지만 크리스의 옷이 휘날릴 정도는 아니었다. 크리스는 그 바람 속에서 그의 얼굴을 봤다.
언젠가 그가 우주에 관해서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늘 보는 채널이 그의 연설 영상이니 만큼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리운 추억’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먼 옛날에 애수가 커진 듯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는 한스의 얼굴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그게 사실인지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늘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마음의 거울을 보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그 눈빛은 꽤 슬퍼 보였다. 크리스는 그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그의 눈빛으로 이미 직감했다. 그는 과거의 이야기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편이라고. 어디까지나, 크리스가 한 생각일 뿐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외계인 ‘한스’는 어린 시절 자신을 배양한 어미를 잃어 이리저리 돌과 우주의 숨 막히는 듯한 하늘을 보며 헤매다가 행성 안에 있는 어느 집단에 소속하게 됐다. 그 집단은 하나의 리더로 구성된 왕국 같은 개념이었다. 왕은 그에게 일을 시키고, 시켰다. 그래서 자신의 신하라는 걸 증명하게 시켰다. 한스는 이를 따른다. 시키는 일을 하고, 충성을 맹세하고, 밤에는 보초를 섰다. 모든 생물이 잠드는 시간에 혼자 생존의 불안감을 감당했다. 그래서 한스는 안다고 했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지금까지 정확히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한스한테 그 ‘왕’한테 복수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한스는 답했다.
‘이젠 없습니다. 아무것도요. 그곳에는 없습니다.’
한스는 늘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법이 없었다. 얼버무리기의 달인이라고 해야 할까. 곤란한 질문을 늘 무마하듯이 넘겨버렸다. 답을 하든 하지 않든 아쉬울 없는 질문이면 더더욱 그런 편이었다. 그리고 꽤 대답을 피하는 과정을 좋아했다. 한스는.
“제 기억은 이 정도군요. 하지만 듣지 못한 분께는 또 하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스는 웃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흰머리나 파란 넥타이를 고수하는 정장 스타일은 진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자, 오늘 여러분을 이런 낡은 광장에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지구의 존속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야죠.”
‘지구의 존속은 무슨. 결국 아무것도 내놓은 대책이 없는 주제에.’
냉소. 크리스가 한스한테 가진 감정은 정확히 말하면 불신과 분노에 가까웠다. 애초에 한스가 없었다면, 크리스는 애매한 희망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지구의 종말도 예정보다 빨리 나왔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내심 이 세상이 모래 폭풍과 함께 망하길 바랐다. 하지만 한스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냉소적인 그녀의 마음을 누구도 봐주지 않았다. 차가워진 그녀를 누구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말이다. 크리스한테 필요한 건 위로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일을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 없었다. 그녀는 너무 마음을 내보였던 탓일까? 아니면, 위로받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일까. 크리스는 자기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가족 사이에서 혼자 외면하고, 동생인 ‘제니’가 연락해도 전혀 받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아니었다. 이젠 이 세상에는 볼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 정말 후회된다. 지금 무력하게 한스를 보는 그녀의 심정이었다.
그리고 분노. 분노는 왜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끓어오르고, 괜찮을 것만 같은 순간에 타오르는 걸까? 그 이유는 한스 때문이다. 크리스는 애써 눌러 참았다. 갚고 싶어도, 갚지 못하는 존재한테 속으로 화풀이했다. 그리고 또다시 자괴감과 슬픔에 쌓인다. 괴로운 마음은 오래 지속되었다.
‘세상은 끝날까?’
그녀가 슬픔 물음을 속으로 물을 때 한스는 이에 대해 대답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그 말에 크리스의 얼굴이 위로 향했다. 한스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