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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역할 게임(2)

별별별말을 다 해 2025. 4. 10. 04:11

[두번째 게임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질문이 있으시다면 손을 들어주세요.]

라디오는 익숙한 듯이 우리한테 지시했다. 물론, 눈앞의 문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봤던 체스방 같이 이상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까 전에 본 방이 거짓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멀쩡한 곳이었다. 라디오는 우리가 성 로비에 서 있자, 입을 열었다. 통신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지, 말하는 목소리에도 노이즈가 심하게 꼈다.

[질문이 없으시다면, 다음 설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성은 여러분이 가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하는 두 번째 장소라고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팀은 다른 성에서 각 팀마다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전투?”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걸리는 한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라디오는 노이즈가 잔뜩 낀 채로 내 말에 대답했다.

[……네.]

“여기에서 싸우기까지 해야 해?”

도병환이 자기 머리를 감싸쥔 채로 말했다. 연경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말 조심해.”

“그래도 싸우는 거라면, 전쟁이랑 뭐가 다르냐.”

나는 ‘나도 알고, 우리도 알아’라고 도병환한테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도병환은 아마도 우리가 처한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럼, 저희는 혹시 맨몸으로 싸우나요?”

이때 규아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애가 입을 열었다.

[……무기는…… 제가 알아서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휴식을 취해…… 내일 보도록…….]

라디오의 노이즈는 점점 심해져서 지지직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라디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차영훈과 눈이 마주친 이후 노이지가 심하게 낀 라디오의 전원을 껐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차영훈한테도, 다른 아이들한테도 들렸을 터였다. 라디오가 꺼진 지금에 와서야 이곳이 내가 알던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성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흘렀다. 다들 ‘역할’이라는 주제를 넘어와서야 골똘히 게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게임’에 대해서건 역할에 대해서건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 놓여 있었다. 아이들이 하고 있는 생각도 가지각색일 것이다. 누구는 라디오가 한 말 중에서 생방송이란 말의 뜻을 쫓고 있을 것이며, 누구는 라디오가 직접 부여한 역할과 게임에 집중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런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라니? 무슨 좋은 방법이 있어?”

내 말에 연경이가 대답했다. 나는 연경이가 내 눈을 계속 보는 게 부담스러워 다른 곳을 보는 척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언니, 우리 완전히 갇힌 것 같아요.”

규아라는 애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집어 삼킨 채로 괜찮은 척 웃었다. 누구 하나 괜찮지 않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다들 내가 어떤 말을 제대로 해 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시선이 나한테 모일 때쯤 차영훈이 입을 열었다.

“결국, 두 번째 게임에 관한 설명은 못 들었네.”

“야, 넌 그게 중요하냐? 쟤 부담 가지는 것도 알고 있잖아.”

김정우는 손가락으로 굳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확실히 부담이긴 하다. 도병환은 자신의 턱에 손을 갖다대며 말했다.

“라디오는 왜 갑자기 꺼졌냐. 우리 이러다 전멸나는 거 아니냐고. 우리가 불리하잖아! 저쪽에는 이영한까지 있는데."

“…….”

“그래서? ‘이영한’이란 애가 뭐가 어때서?”

나는 도병환의 말을 받아쳤다. 도병환은 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잘못 걸린 거야. 이런 싸움에서는…….”

“잘못 걸렸다고? 나 그렇게 생각 안 해.”

차영훈이 대답했다. 이런 말 한마디 덕분에 다른 아이들은 한참 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분위기 속에서 연경이가 꺼낸 말이 있었다.

"자기 소개라도 하고 갈래?"

“…….”

이규아는 잘 모르겠지만, 남학생 측은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 반응은 계속되는 어색한 침묵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는 남학생들끼리 무리로 몰려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도병환을 제외하고는 굳이 자기소개를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김정우의 교복도 유람고 출신이었다. 같은 학교인 도병환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우리한테 낯설다면, 낯선 존재는 중학교에 다니는 애였다.

나는 이미 힘들어서 주저 앉아야 하는 시점에서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라디오가 제시한 게임인지 뭔지가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헤쳐나가야만 했다. 나는 이규아한테 다가갔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

가까운 곳에 있던 연경이도 입을 열었다.

"아, 네. 잘 부탁해요! 지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요."

"쏘. 우리가 이기면 살 수 있다고 라디오가 말하긴 하는데,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글쎄."

연경의 불길한 말에 나는 애써 모르는 척 대꾸했다.

"언니들은 역할이 어떻게 되세요?"

이규아는 우리한테 종이를 내밀었다. '폰'이라고 쓰인 글자가 내 눈앞에 보였다. 나는 이규아가 내민 종이를 잡아 직접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바로 밝혀도 되나?’

나는 이규아가 우리의 역할도 묻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아직 묻지 않았다. 애초에 물을 생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역할이라고 했지?”

연경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 라디오가 말한 게 역할에 관한 거였어.”

내 말에 연경이와 이규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하얗게 변한 얼굴은 숨소리와 함께 제자리를 애써 참는 듯이 보였다. 나는 굳이 역할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연경이는 뭔가 신경 쓰이는 듯이 보였다. 나는 연경이의 그런 면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또 다시 말을 걸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 했다. 애초에 누군가는 밝혀야 게임의 진전도 생긴다. 눈앞의 여자애는 그런 의미에서 말을 걸었다. 그리 확신할 수 있었다.

“자자, 무서워하는 건 이제 그만하자.”

내 말에 두 사람이 떠는 걸 쉽게 멈출 수 없었다. 나도 그랬다.

“쏘는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

“글쎄.”

“난…… 걔네들이 겁을 집어 먹지 않는 게 신경이 쓰여. 걔네들은 진짜 이 상황이 무섭지도 않은 건가.”

라디오의 존재는 나한테 역할을 줬고, 다른 공간이라는 무대까지 줬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섣불리 아는 척 하는 대신 입을 함부로 열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말하지 않으면 불안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같이 입을 닫고 있는 편이 나았다. 나는 이규아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규아는 이런 나를 계속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소연 언니가 리더라고 했죠? 혹시 이거 맡겨도 될까요?”

“……알았어.”

왜 이런 걸 나한테 맡기는 걸까? 생각보다 그 말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전략이 필요해.”

“뭐…?”

갑작스러운 차영훈의 말에 내가 말하자, 그 애는 진지한 얼굴로 내가 있는 쪽을 보고 말했다. 김정우가 그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

“나 장기 둘 줄 알거든. 체스랑 비슷한 거지?”

“……넌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지금은 때와 수단을 생각해야지, 차영훈.”

차영훈의 말에 김정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차영훈은 그 말에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여전히 무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남자들끼리의 이야기는 끝났는지 우리 쪽으로 와서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작전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꼭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 ‘게임’이라는 게 평범하다면 모를까.

우리는 성 로비 안에서 어이없는 게임에 관한 규칙을 지켜야만 했다. 라디오가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다는 말을 차영훈한테서 듣고 싶었지만, 그리 쉽게 흘러갈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나는 차영훈을 보고 말했다.

“……누구 하나는 역할명을 알아야 돼.”

“그래도 다 밝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까?”

“몰라도 돼. 내가 움직이면 되니까.”

도병환이 입을 열었다. 도병환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나한테 말했다. 그 말은 새삼스레 왜 꺼낸 건지 이해는 잘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가장 먼저 사태를 이해하기 이전부터 ‘작전’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한테는 그 말이 거슬린다면 거슬렸다.

하지만 차영훈은 정말 진지하게 ‘게임’에 대해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정우가 또 게임이라는 화제에 뛰어들었다.

“그러니까, 잘만 하면 쟤네들이 알아서 항복하게 만들 수 있다니까.”

“닌 아직도 그런 말하냐.”

도병환이 김정우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그럼, 다른 수가 어디에 있는데?”

“일단, 다 사는 쪽으로 생각을 해 봐야 알 거 아니야?”

도병환은 김정우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걔네들이 항복해도 걔네들도 죽어.”

“있잖아, 애들아.”

내 말에 고민하던 애들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이런 대화에 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들었지만, 아이들은 조용히 내 말을 듣기 위해 입을 닫고 있었다.

“우선, 역할은 공개하지 않기로 할까?”

“어차피, 상관없어. 내가 옮기면 그만이니까……. 신소연.”

도병환이 말했다. 나는 그게 알 수 없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 애가 말하는 대로 넘어가려고 했다. 어쨌든, 나는 내 역할이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이때 차영훈이 입을 열었다.

“도병환은 킹이야. 킹의 권한은 다른 역할의 말을 움직일 수 있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쉽게 알려주는 거 아냐?”

연경이가 조심스레 내뱉은 말에 차영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알려주는 게 맞지? 그러게. 벌써부터 말하면 망한다니까.”

“야, 너 진짜 제정신이야?”

아무렇지 않게 웃는 차영훈을 보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차영훈한테는 그 말마저도 하나의 장난처럼 받아들이는 구석이 있었나 보다. 차영훈은 웃는 얼굴을 쉽게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각오했던 일이잖아. 이제 와서 놀라는 거면, 내가 이상한 놈이지? 안 그래? 신소연.”

“놀라고 뭐고 넌 우리한테…….”

“난 구해진 거지. 실상을 아는 게 아니야. 그리고 넌 우리 팀의 ‘리더’야. 그렇게 정해진 거지.”

“야야, 차. 그런 덤터기를 왜 하필…….”

김정우가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꺼내려고 할 때, 내가 말했다.

“정해진 거였다면, 왜 나인지 알려줄 생각은 없는 거지?”

“정해진 거였다면, 왜 나인지 알려줄 생각은 없는 거지?”

차영훈은 그렇게 묻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너한테 일깨워주려고 하는 것뿐이야."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차영훈의 말은. 하지만 그 애의 눈빛은 나와 다르게 마지막 희망이라도 놓치지 않는 듯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가겠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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