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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뽑은 ‘역할’에 따라서 게임을 시작하며, 자기 역할을 누군가한테 밝힐지는 자유에 맡깁니다. 다시 문밖으로 들어가 주세요. 어떤 역할이 된 여러분을 소개해 주는 장소가 될 겁니다.]
아이들은 종이를 들고,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자기가 왜 이 종이를 들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그 종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즘에 맞은편에서 ‘깡’하고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마 우리가 아니라, 상대편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라디오는 부서진 채로 새로운 공간에 들어왔다. 키가 큰 남자애가 맞은편에서 두 개로 나누어진 라디오를 밟고 있었다.
“신소연, 쟤가 이영한이야. 너는 아예 모르겠지?”
당연히 모르지……. 나는 차영훈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걔 학교에서 아주 불량한 애야.”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난 내가 뽑은 ‘Queen’이라는 문구에 불길함을 느끼고 있는데, 얘는 틈을 주지도 않는다. 정말 아까부터 차영훈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사실을 말해주었다.
“쟤네들은 여전히 쌈박질이네.”
도병환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열린 문은 어느새 파란색 이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방이 되어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타일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라디오의 말에 따라 걸음을 움직인 우리들은 부서진 라디오를 밟고 있는 상대편 아이들을 만났다. 참 잘나기도 했다. 절로 드는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지만, 자신감 있는 태도 자체는 우리보다 나은 점이 있어 보였다.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부터가 비정상적인 애들이라는 느낌이었다. 어떤 ‘게임’인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기억이 없는 내가 리더라는 게 가장 우스운 일이었지만, 자신만만한 태도를 하는 애들이 의아했던 건 사실이었다.
차영훈은 왜 나한테 리더를 하라고 한 걸까. 결과적으로, 어떤 게임을 한다고 해도 내가 리더를 해서 이길 것 같지도 않은데.
차영훈이 말한 백일고에서 불량하다는 ‘이영한’은 이 상황에서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다 만만한데?”
그리 말해놓고선 부서진 라디오를 새로 공간 안에 뻥 걷어찼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 좆밥들인데 뭐 상대가 되나? 안 그렇냐? 백강현.”
이영한은 하얀 머리 남자애인 ‘백강현’을 보고 물었다. 백강현이라고 불리는 애는 가만히 우리 쪽을 보다가 말없이 웃으면서 이영한을 바라봤다.
우리 쪽에 있었던 라디오는 퉁퉁 몸체를 튕기며 알 수 없는 공간의 중앙으로 다가왔다. 파란색 이공간이었던 공간은 커다란 체스 말의 기둥이 있는 흑백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라디오가 우리 앞으로 나아가자 이영한도 라디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영한 씨는 그곳에서 가만히 서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이영한 앞에는 투명한 유리 벽이 올라왔다.
“그 말은 듣기 싫은데. 우리가 왜 네 마음대로 해야 하는 거냐. 네가 우리한테 명령할 자격도 없는 주제에.”
천천히 조곤조곤 말을 잇는 이영한과 다르게 라디오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영한은 라디오를 보고, 비웃었다.
“왜? 또 부서질까 봐 겁이라도 나?”
“그만 좀 하지?”
나는 이영한의 말에 반박했다. 이영한은 날 노려보다가 몇 걸음 뒤로 물러갔다.
“여러분께 규칙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있던 왼쪽 판에는 체스판이 말과 같이 놓여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공간. 지금 우리도 하얀 타일의 바닥 위에 서 있었다. 은은한 침묵과 함께 라디오는 왼쪽의 커다란 체스판으로 올라가 규칙에 관한 설명을 마저 했다.
“여러분의 목숨은 하나의 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한테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하나의 말을 움직일 권한이 주어집니다. 질문 있습니까?”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 라디오의 말에 다른 아이들이 침묵을 유지했다. 아까 전에 뽑은 종이의 내용이 신경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그런 알 수 없는 ‘리더’ 자리는 차영훈한테 넘겨줄 생각이었는데, 그런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게임이었다. 우리 팀의 아이들은 따로 질문이 없냐는 라디오의 말에 침묵이 길어질수록 날 바라봤다. 나는 억지로 질문을 쥐어 짜내서 손을 살짝 들었다.
“저기,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네, 신소연 씨.”
“우리들이 뽑은 종이는 말의 역할에 맞추는 거지?”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해 두죠.”
여전히 시간이 지날수록 듣기 싫은 소리만 내뱉던 라디오는 짧게 한숨을 쉬다가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살인 체스입니다. 여러분의 역할에 있는 특정 말이 죽으면 여러분한테 부여된 능력이나 목숨까지도 앗아갑니다.”
나는 라디오의 말의 중간 부분부터는 귀를 막았다. 내가 진심으로 듣기 싫은 소리였다.
“차례로 따지자면, 검은 말인 인간 편의 팀이 먼저 선공할 수 있겠군요. 어때요? 하시겠습니까?”
라디오는 사악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여러 개를 가진 역할은 어떻게 되지?”
백강현이 차분히 눈을 감다가 뜨면서 말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만일 자기가 가진 역할이 많은 말의 경우에는 특정 ‘말’로 판정을 내릴 생각입니다.”
“특정 말이라…….”
상대편 쪽에서 라디오의 말을 따라 고민에 빠져있을 때, 연경이가 내 등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야, 쏘…….”
“왜? 연경아. 무슨 일 있어?”
연경이는 고민하다가 내 귓가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너한테 ‘역할’ 말해도 돼?
-그건 갑자기 왜?
-너는 종이에 뭐라고 쓰여 있었어?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고 우리가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설픈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얼굴이 연경이한테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휘저었다. 연경이는 실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법이었다. 그 법을 내가 정한 건 아니었지만.
“와, 우리 진짜네!”
그리고 연경이와 나의 기류 속에 파고든 건 김정우의 큰 목소리였다. 김정우는 자신이 든 종이를 보며, 차영훈한테 말했다.
“진짜건 가짜건 뭐야……. 너 진짜 몰랐냐?”
"어."
김정우는 살짝 정색하며, 도병환의 말에 답했다. 차영훈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아주 잘나셨어."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차영훈은 그런 내 이야기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좀."
"분위기 파악 좀 해. 여기 애들 다들 벌벌 떨고 있는 건 안 보이냐?"
"......그렇다고, 이제 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야기잖아."
그래, 그래. 잘나셨어. 재수 없음을 넘어서서 그 애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이 분위기를 타서 나는 차영훈한테 다가가서 내가 왜 '리더'여야 하는지 물어봐야 했다.
"이봐, 깡통. 우리가 이기면 보상은 있어?"
그런데, 김정우가 엉뚱한 질문을 라디오에 말했다. 라디오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작게 내다가 답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질문 중에서 가장 좋은 질문이군요."
"내 질문에나 대답해. 확실한 보상이 있냐고."
김정우는 가만히 라디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라디오는 그 말에 핵심이라도 찔린 건지 꽤 오래 침묵을 유지했다.
"……생존자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라디오는 다시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옅게 내기 시작했다. 그다음 말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라디오의 모습은 평온하고 고요했다. 마치 우리가 먼저 무언가를 요구해야만 할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불길한 것만 아니라면 나도 심장이 빨리 뛰지 않았을 터였다.
"보상이 있는 거겠지. 저 라디오에는 내키지 않는 보상이……."
"그게 말이 돼? 이 분위기에서?"
"신소연, 실망이네. 너 예전 기억 돌아오면 땅을 치고 후회할걸? '내가 이렇게 겁을 집어삼켰다니!' 이러면서."
"확실히 쏘가 처음에는 약하지."
연경의 말에 차영훈이 한마디 더 얹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중해지는 게 좋아, 둘 다."
그리고 차영훈과 눈이 마주친 연경은 또다시 내 뒤로 숨었다. 차영훈은 또 웃었다. 이 일과 완전히 무관한 사람처럼.
"작전 회의는 다 끝난 것 같군요. 내일 저녁에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린 뒤, 게임을 진행하겠습니다."
작전 회의는 무슨. 살인 체스라는 단어에 모두가 겁을 집어먹은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금 여러분이 온 곳은 여러분이 잠시 머무를 기숙사입니다."
이상한 게임에 대해 알 수 없는 설명을 듣고 문밖으로 나가자, 다시 처음 문을 열 때 있었던 초원으로 돌아왔다.
"적팀과 헤어져서 아쉬우신가요? 도병환 씨."
"……."
도병환이 라디오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기색이 가득했다. 초원 너머로 보이는 곳은 하나의 성이었다. 기숙사라기에는 너무 과장된 게 아니냐고 되물을 수는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정우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힐끔 보다가 다시 차영훈한테 눈을 돌렸다. 나라고 해서 이 황당한 상황이 감당되는 건 아니었다. 라디오는 통통 튀어서 성 앞까지 멋대로 도착했다. 마치 우리들 보고 들어오라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뛰고 있었다.
"이거 들어가라는 소리 같은데."
차영훈이 말했다. 이 상황에서 안에 또 뭐가 있을 줄 알고. 내 후들거리는 다리가 쉽게 접히지도 않았다.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데?"
김정우는 차영훈의 친구인 나한테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원래 무서움에 금방 주저앉았을 터였지만, 나는 겨우 발을 움직인 채 차영훈한테 말했다.
"꼭 거기에 들어가야 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저쪽에 있는 문에 있으니까."
"저 안에도 이상한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말에 차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차. 얘가 떨잖아.”
김정우의 말에 차영훈도 그제야 내 다리를 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빨리 말해줬으면 모를까, 지금은 완전히 굳은 상태였다. 몸이든 마음이든. 내가 살짝 주저앉자, 다른 여자애 두 명이 나를 잡아주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쏘, 아주 힘들어 보여.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보여야 했다. 차영훈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괜찮아."
나는 겨우 겁먹은 감정을 숨기고 일어섰다.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탓인지, 라디오는 길게 침묵하다가 말했다.
[두 번째 게임의 규칙은 이 문 안에 들어가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