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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 팬픽

별별별말을 다 해 2026. 5. 12. 20:21

가르그 마크의 오후는 평화롭다 못해 나른했다. 복도를 지나는 학생들의 발소리 너머로 멀리 연무장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수도원 구석의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는 마치 다른 세상인 양 고요했다.

“순번대로 서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꽤 고전할 거라고 말했지, 힐다?”

평소보다 한 톤 낮은,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섞인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이리아 아이스너는 팔짱을 낀 채 제 눈앞에서 보란 듯이 풀밭에 누워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무뚝뚝한 교사로서의 위엄을 세우려 미간을 좁혀 보았지만, 제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연인을 강하게 밀어낼 배짱은 그녀에게 없었다.

“에이, 선생님~ 힐다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단 말이에요. 이런 연약한 미소녀한테 훈련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아요?”

힐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생긋 웃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이리아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갖다 대었다. 이리아의 손가락 끝에 닿는 힐다의 피부는 부드러웠고, 살짝 풍기는 달콤한 향기는 이리아의 이성을 조금씩 흐트러뜨렸다.

“……레아 님의 일이라면 너도 내가 약하다는 거 알잖아. 훈련은 의무야.”

“그건 공적인 일일 때고요. 지금 여기엔 우리 둘뿐인데?”

힐다가 몸을 일으켜 이리아의 목에 팔을 감았다. 평소 무뚝뚝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평민 교사, 이리아 아이스너가 오직 자신 앞에서만 ‘말랑해지는’ 순간을 힐다는 가장 사랑했다.

“아까 도로테아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선생님, 또 눈치 없게 군 거 아니죠? ‘속옷이 어쨌다고?’ 같은 소리나 하고.”

“그, 그건…… 그냥 대화의 흐름상 물어본 것뿐이야.”

당황한 이리아의 귀끝이 붉어졌다. 힐다는 그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이리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선생님은 정말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길치에다 눈치도 없고, 고지식하기만 해서.”

“힐다, 그래도 난 널 지켜주겠다고…….”

“네, 네. ‘언니가’ 지켜주겠다고요? 말은 참 잘해.”

힐다가 킥킥거리며 이리아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었다. 평소엔 ‘선생님’이라 부르다가도 사적인 자리에선 서슴없이 ‘언니’나 ‘너’라고 부르는 이 도발적인 제자에게, 이리아는 매번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다.

그때, 저 멀리서 통로를 지나가던 다른 반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며 거리를 두려 했지만, 힐다는 오히려 보란 듯이 이리아의 품으로 파고들며 그녀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힐다, 남들이 보겠어.”

“보면 어때요? 가질 수 없는 미인인 힐다랑 교제 중이라는 걸 다들 부러워하게 둬야죠.”

힐다의 눈동자 속에 소유욕이 번뜩였다. 그녀는 이리아가 곤란해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꼼짝 못 하는 이 강직한 여자가 제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이리아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결국 힐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욱하는 성미도, 고지식한 의무감도 힐다의 응석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평생 누군가의 명령만 듣는 인형처럼 살았을지도 모를 인생에, 힐다라는 변수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강렬했다.

“……어디에 갈까? 훈련 끝나고 힐다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나도 좋겠네.”

패배를 시인하는 이리아의 말에 힐다가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역시 선생님은 멍하니 계셔도 위기 상황엔 의지가 된다니까요? 그럼 저기 시내에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 가요. 짐은 당연히 선생님이 들어주는 거예요?”

이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들에게는 ‘냉혈한 FM 교사’라 불리는 그녀였지만, 힐다의 전용 기사가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 평판조차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 힐다 님. 분부대로 할게.”

“아! 그 호칭 사적으로만 쓰라고 했죠! 밖에서 쓰면 또 꼬집어줄 줄 알아요!”

얼굴이 빨개진 힐다의 외침과 이리아의 낮은 웃음소리가 꽃그늘 아래를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의 평생을 약속한 시간은 그렇게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흘러가고 있었다.